일본 고전시가 해설입니다. 백인일수 해설을 하다가, 일본 고전시가의 다른 장르에도 관심이 생겨서 글을 씁니다.
관련 글
● 와카(和歌)는 57577, 31자를 기본 형식으로 합니다. 소재는 사랑·자연 등 다양합니다. 백인일수는 와카를 모은 책입니다.
● 하이쿠(俳句)는 575, 17자를 기본으로 하면서 계절을 나타내는 말(季語. きご), 호흡을 끊어 여운을 주는 말(切字, きれじ)을 넣습니다. 계절을 나타내는 말이 들어가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만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합니다.
● 센류(川柳)는 하이쿠와 마찬가지로 575, 17자를 기본 형식으로 하면서 제약을 덜어 내고 쓴 시입니다. 제약이 적기 때문에 소재는 정말 다양합니다.
● 참고로 글자 수는 기본 형식에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하이쿠는 575, 557, 875 등 글자 수를 바꿔 가며 쓰기도 했습니다. 글자 수가 정형보다 많은 걸 지아마리(字余り, じあまり)라고 합니다.
이번에 다룰 시는 일본에서 굉장히 유명한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まつお ばしょう, 1644~1694)의 하이쿠(俳句)입니다. 끊어서 읽기 좋게 /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旅に病んで / 夢は枯野を / かけ廻る
たびにやんで / ゆめはかれのを / かけめぐる
여정 중 병 들고 / 꿈은 마른 벌판을 / 뛰노는도다
이 하이쿠는 마츠오 바쇼가 와병 중에 지은 시(病中吟, びょうちゅうぎん,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병중음)이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하이쿠이기 때문에, 이 하이쿠를 접하면 대개 죽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旅 | たび / 여행 |
病む | やむ / 병들다 |
夢 | ゆめ / 꿈 |
枯れる | かれる / 시들다 |
野 | の / 들 |
枯野 | かれの / 풀이 마른 들판 ●계절을 나타내는 말(季語. きご)입니다. 주로 겨울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
かけ廻る | かけめぐる / 駆け巡る, 떠돌다, 뛰어 돌아다니다 |
이 하이쿠에 대한 해설입니다.
夢は枯野をかけ廻る 부분입니다. ゆめはかれのを / かけめぐる로 끊어 읽는 게 일반적이지만, ゆめはかれ / のをかけめぐる로 끊어서 읽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이렇게 끊으면 "꿈은 시들고 / 마른 벌판을 뛰노는도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①이렇게 해석하면 꿈은 시들었는데, 벌판을 뛰어 다니는 것이 의미 상 어색해진다는 점, ②枯野가 그 자체로 계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 등을 보면 ゆめはかれのを / かけめぐる로 끊어 읽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かけ廻る의 주어는 꿈인가 나인가. 꿈이 かけ廻る의 주어라고 보아, "(나의) 꿈은 시든 벌판 위로 방황한다" 또는 "(나의) 꿈은 마른 벌판을 뛰논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한편 숨은 화자 '나'를 주어로 보아 "꿈 속에서 (나는) 마른 벌판을 뛰논다" 또는 "(나의) 꿈은 (내가) 마른 벌판을 뛰노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위에서 제시한 かけ廻る의 해석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꿈 속에서 나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 하지만 병이 들어서 실제로는 그럴 수 없다."라는 의미에서 슬픈 감정을 느낄 수도 있고, "비록 지금은 병이 들었지만, 내 꿈은 마른 벌판을 뛰노는 것이다. 어서 병을 치료하자."라는 의미에서 희망적인 감정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辞世の句 (じせいのく)란, "죽을 때 남겨 놓는 시가 따위의 문구"입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본래 이 시는 病中吟이니까, 굳이 따지자면 죽을 걸 전제로 쓰는 辞世の句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워낙 유명한 인물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다 보니, 辞世の句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나 일본군 무관 등이 할복(切腹, せっぷく)을 할 때 이 시를 읊고 할복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할복은 타인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어 명예를 지킨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의 사약(賜藥)과 맥락이 비슷합니다. 간단히 말 하자면 폼 나게 죽게 해주는 겁니다. 폼 나게 죽는 게 목적이니까, 죽기 전에 시도 읊고 죽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하이쿠 旅に病んで~를 통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