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菅義偉)는 이 글이 작성된 2018.1.31. 기준으로 1,863일째 일본의 내각관방장관을 맡고 있는 인물입니다. 내각관방장관은 한국의 청와대 비서실장·대변인·국무총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직책이고, 그런 중요한 직책을 굉장히 오래 맡았기 때문에 한국 언론에도 언급이 매우 많이 된 인물입니다. 아래 관련 글은 일본의 관방장관과 다른 정무직 공무원이 어떤 일을 하는지 간략하게 소개해놓은 글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인물은 일본의 정치인 스가 요시히데입니다. 이 글의 본문은 일본 위키피디아 菅義偉 항목의 2018.1.9. 06:09 버전을 번역하고 약간 편집한 것입니다. 해당 문서는 CC BY-SA 3.0 라이센스(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Unported) 하에서 이용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이 문서도 같은 조건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간략한 약력으로 보고 싶으신 분은, 네이버 인물검색을 참고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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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사람 이름은 가능한 한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맞추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대행과 대리를 혼용하여 사용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일단 원문에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1948.12.6.~)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이 글이 작성된 2018.1.31. 기준으로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8선)이며, 내각관방장관(81·82·83대)과 오키나와기지 부담경감담당대신을 맡고 있다. 내각관방장관을 2012.12.26.부터 역임하였고, 이 글이 작성된 2018.1.31. 기준 1863일째 재임중이다. 이는 현재 역대 내각관방장관 중 가장 긴 재임기간 기록이다.
요코하마시 시의회 의원(2선), 총무대신(제7대), 내각부특명담당대신(지방분권개혁), 우정민영화담당대신(제3대), 자민당간사장대행(제2대) 등을 역임하였다.
아키타현(秋田県) 오가치군(雄勝郡) 아키노미야촌(오가치정을 거쳐 현재는 유자와시(湯沢市) 아키노미야) 중앙부의, 구 국도변에 집이 있었던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족으로는 아버지·어머니·누나 2명·남동생 1명이 있다. 아버지 스가 와사부로(菅和三郎)는 남만주철도(南満州鉄道)의 직원으로서, 당시 만주국의 수도였던 퉁화시(通化市; つうかし)에서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고향 아키노미야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스가 와사부로는 '아키노미야 딸기(秋の宮いちご)'를 브랜드화하는 데 성공하여 아키노미야 딸기 생산출하조합의 조합장과 오가치정의회 의원, 유자와시 딸기 생산집출하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하였고, 2010년에 93세로 사망하였다. 어머니와 숙부·숙모는 전 교사이며, 두 누나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오가치정립 아키노미야 소학교(현 유자와시립 오가치 소학교) 졸업 후, 오가치정립 아키노미야 중학교(현 유자와시립 오가치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아키타현립 유자와 고등학교에 2시간씩 걸려서 통학하였고, 3학년에는 진학반에 소속되었다. 후에 잡지 Friday(フライデー, 프라이데이)에서 "특별히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고, 누나가 진학한 홋카이도 교육대학에 원서를 냈지만 불합격했다"라고 보도되었으나, 모리 이사오(森功)의 취재에서는 스가 본인은 당시 교사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서 홋카이도 교육대학에는 원서를 넣지 않았다고 하였다. 아버지로부터 농업대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고등학교 동기들과 집단취업을 하며 도쿄(東京)에 상경하였다. 도쿄에 가면 뭔가 변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상경하였으나, 아키타에 있던 시절과 다름 없는 나날을 이타바시구(板橋区) 골판지 공장에서 보내면서 현실의 험난함을 통감하였다. 상경 2년 후, 당시 사립대학 중 가장 학비가 저렴하는 이유로 호세이 대학(法政大学)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1973년 호세이 대학을 졸업하고, 겐덴세비 주식회사(建電設備, 현 주식회사 케이네스(ケーネス))에 입사하였다.
1975년에는 정치인을 지망하여 호세이 대학 취업과와 상담을 하였고, OB회 사무국장으로부터 호세이 대학 출신인 제57대 중의원 의장 나카무라 우메키치(中村梅吉)의 비서를 소개받아, 같은 파벌이었던 중의원 의원 오코노기 히코사부로(小此木彦三郎)의 비서가 되었다. 이후 11년에 걸쳐 비서를 맡았다. 1983년에는 오코노기 중의원이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함에 따라 대신 비서관을 맡게 되었다.
1987년에는 요코하마시 시의회의원 선거에 출하마였고, 니시구(西区)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그 이후 시의원을 2회 맡았다. 요코하마시의 시정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오코노기 중의원이 죽은 후에는, 당선 횟수가 2회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오코노기의 사실상 대역으로서 활동하였으며, 비서 시절에 얻은 정재관계의 인맥을 활용하여 실력을 발휘하였다. 다카히데 히데노부(高秀秀信) 시장으로부터 인사안 등에 대해 상담을 자주 받는 등, "그림자의 요코하마 시장(影の横浜市長)"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경력
1996년의 제41회 중의원 의원총선거에는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제2선거구에서 자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고, 신진당(新進党)의 공천과 공명당(公明党)의 추천을 받은 우에다 아키히로(上田晃弘)와, 구 민주당(民主党 1996-1998)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 오이데 아키라(大出彰)를 격파하고 당선되었다.
1998년의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서는 소속되어 있던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의 회장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를 지지하지 않고 스승으로 받드는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静六)를 지지하였고,\ 헤이세이연구회를 탈퇴하였다. 이후에는 고치카이(宏池会, 굉지회)에 가입하였다. 2000년 제2차 모리 요시로(森喜朗) 내각의 불신임 결정을 둘러싼 가토의 난(加藤の乱)에서는, 가토 고이치(加藤 紘一) 등에 동조하여 불신임안 투표에는 결석하였지만, 이후 가토파가 분열되었을 때에는 친 가토 그룹인 오자토파(小里派)가 아니라 반 가토 그룹인 호리우치파(堀内派)에 가담하였다.
2005년 11월 2일에는 제3차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개조내각에서 야마자키 쓰토무(山崎力)와 함께 총무부대신(副大臣)에 임명되었고, 2006년 9월 26일까지 총무부대신을 담당하였다. 2006년에는 재도전지원의원연맹(再チャレンジ支援議員連盟)의 설립에 참가하였다. 이 의원연맹은 실질적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를 지원하는 모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총재선거에서 아베 신조가 승리하였고, 2006년 9월에 발족한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는 당시 4선에 불과했던 스가 요시히데를 총무대신(우정민영화 담당대신 겸직)으로 임명하였으며, 스가는 이로서 첫 입각을 달성했다. 2006년 12월에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지방분권개혁) 보직도 받았다.
2007년 제21회 참의원 의원통상선거 패배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내각 개편이 이루어졌고, 2007년 8월에는 총무대신과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자민당 선거대책 총국장에 취임하였다.
2007년 9월에는 아베 신조 총리의 퇴진과 함께 치러진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서 후쿠다 아스오(福田康夫)를 지지한다는 고치카이(宏池会)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아소 다로(麻生太郎)를 지지하였고, 아소 다로의 추천인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후쿠다 야스오가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에 취임하였으며, 후쿠다 야스오 정권 하에서는 선거대책 총국장이 격상된 선거대책 위원장에 고가 마코토(古賀誠)가 취임하였고, 스가 요시히데는 선거대책 부위원장으로서 선거 대책 업무를 계속하여 맡았다.
아소 다로 내각 출범(2008.9.24.) 후에는 아소의 측근으로서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아소 정권을 지지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정책을 제안하여 정부지폐(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직접 발행하는 지폐)의 발행과 무이자국채의 발행, 정치인 세습 제한 등을 주장하였다.
2009년 7월에는 고가 마코토가 도쿄 도의회의원 패배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자민당 선거대책 위원장을 사임하였으나, 스가 요시히데는 자민당 선거대책 부위원장직을 사임하지 않고 위원장 대리로서 직후의 제45회 중의원 의원총선거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2009년 8월의 제45회 중의원 의원총선거에서는, 가나가와현 제2선거구에서 민주당의 미무라 카즈야(三村和也)의 맹추격을 548표의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5선에 성공하였다(상대 미무라는 비례대표 병립제를 통해 첫 당선에 성공하였다(이른바 부활당선)). 이후 2009년 9월 28일에 치러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1996년 당선 동기인 오무라 히데아키(大村秀章)·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마쓰모토 준(松本純 또는 마츠모토 준) 등과 함께 고노 다로(河野太郎)를 총재 후보로 추천하였고, 이와 함께 고치카이(宏池会, 굉지회)를 탈퇴하였다 (자유민주당 총재에는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가 당선되었다).
2010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 부위원장 및 홍보본부장 대리에 취임하였고, 2011년에는 자민당 조직운동본부장에 취임하였다. 2012년 4월에는 우정민영화법 개정안 표결에서 자민당의 찬성 당론에도 불구하고 반대에 투표하였다. 2012년 9월에는 아베 신조가 자유민주당 총재에 취임하면서 자유민주당 간사장 대행으로 기용되었다. 2012년 12월 중의원 의원총선거에서는 미무라 카즈야의 부활당선 여지도 차단하면서 압승하고 6선에 성공하였다. 선거 후에 발족한 제2차 아베신조 내각에서는 내각관방장관에 기용되었고, 2014년 12월 제47회 중의원 의원총선거에서 7선에 성공한 뒤에도 내각관방장관에 다시 임용되었다.
총무부대신
상기한 바와 같이, 2005년 11월 2일부터 2006년 9월 26일까지 제3차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개조내각에서 야마자키 쓰토무(山崎力)와 함께 총무부대신을 담당하였다.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蔵) 총무대신 아래에서 일하면서, 총무성 내부 통제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인사권을 행사한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총무대신
2006년 10월 NHK 단파 라디오 국제방송에 대한 방송 명령에 정의된 방송사항에 '(북조선(북한)에 의한) 납치문제(拉致問題)'를 추가하려는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일본 방송법 제33조에는 "국제방송 등의 시행 명령 등(国際放送等の実施の命令等)"이라는 항목이 있었으며, 거기에 "총무대신은 협회에 대하여 방송구역·방송사항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지정하여 국제방송을 해야 할 사항을 명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2007년 12월에 방송법이 개정되면서 "명령"에서 "요청"으로 표현이 바뀌었다).
2006년 11월 10일에는 방송사항에 "북조선(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특히 유의할 것"을 추가하라는 명령을 NHK에 보냈다. 한편 "보도의 자유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방송 내용이나 방송 횟수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NHK의 편집권에 대한 존중 입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방송법 제44조에는 "편집권"에 관하여 "방송 프로그램의 편집 등"이라는 항목이 있고, 거기에는 "NHK는 국제방송의 방송 프로그램 편집에 대해 해외 동포의 적절한 위안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당시 해외에서 방송되던 단파방송 "바닷바람(しおかぜ)"에 대해, 무선국 허가장을 교부하여 일본 국내 방송에 길을 터주었다.
2007년에 발각된 연금기록문제(年金記録問題)에 관해서는, 후생노동대신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伯夫)이 아니라 총무대신이었던 스가 요시히데가 검증을 담당하였다. (참고로 "연금기록문제"란, 2007년에 국회가 사회보험청 개혁관련 법안을 심사하던 중 사회보험청의 전산에 오류나 미비점이 많다는 것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2007년 7월 29일에 있었던 제21회 참의원 의원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일본 우정공사 총재 이쿠타 마사하루(生田正治)와 회담을 가진 후에는 이쿠타가 총재를 사임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후임 일본 우정공사총재에는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三井住友銀行) 출신의 니시카와 요시후미(西川善文)가 취임한다고 발표되었다. 한편 이쿠타 마사하루는 본인이 사의를 표명한 적이 없다는 반박 기자회견을 하기도 하였다.
관방장관
상기한 바와 같이 2012년 12월 26일에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의 발족과 함께 내각관방장관에 임명되었다. 2013년에는 우정민영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우정사장 사카 아쓰오(坂篤郎)를 취임 6개월만에 퇴임시키고, 고문직에서도 해임하였다. 2013년 발생한 알제리 인질사건(アルジェリア人質事件) 때에는, 방위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례 없이 일본 정부의 전용기를 보내기도 하였다.
2014년 5월에는 내각인사국의 국장 인사를 주도하여, 국장에 내정되었던 스기타 가즈히로(杉田和博) 대신에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를 임명했다는 설도 있다. 전 내각참사관(内閣参事官) 다카하시 요이치(高橋洋一)에 의하면, 국장 인사를 통해 관료를 통제하에 두어 역대 관방장관 중에서도 굴지의 정보수집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014년 7월에 출연한 NHK "클로즈업 현대(クローズアップ現代)"의 방송내용에 대해, 방송 후 NHK에 관저를 통해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도되었으나, 스가 요시히데 본인은 이를 부인하였다. 또한 2014년 11월에는 중의원 해산을 통해 제47회 중의원 의원총선거를 집행할 것을 아베 신조 총리에제 진언하였다고 한다.
2016년 7월 7일에는 내각관방장관 재임기간이 1,290일이 되어 기존 1위였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를 제치고 단독 1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 글이 작성되는 2018년 1월 31일 기준으로는 관방장관직에 1,863일째 재임중이다.
● 헌법 개정에 찬성한다.
●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금지한다는 정부의 헌법해석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 일본의 핵무장에 대해 반대한다.
● 원자력 규제위원회의 새로운 기준을 만족한 원자력 발전소는 작동을 재개해야 한다.
● 여성 미야케(宮家; 궁가) 창설에 반대한다.
(참고로 미야케란, 황족(皇族)이 결혼해서 분가한 가문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미야케의 구성은 황족으로 인정되어 천황 계승권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현행 황실전범(皇室典範)에 의하면, 여성은 천황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황족 여성이 황족이 아닌 남성과 결혼한 경우에는 그 여성의 황족 지위를 박탈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행 황실전범 하에서는 여성이 미야케를 만들 수 없습니다.)
● 2002년에 선택적 부부별성제도의 도입을 구하는 청원을 하였다. 한편, 2014년의 앙케이트에서는 선택적 부부별성제도 도입에 반대하였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민법(民法) 제750조에 의해, 부부는 혼인할 때 남편 또는 아내의 성 중 하나로 성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 "나는 농가의 장남이지만, 지방에서는 농업이 쇠퇴되어 있어 집약화가 필요하다. 도시 농업은 상속세 등 세제(税制) 지원을 해야 한다. 일본은 자원이 없는 섬나라이며,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 정치인의 일이다"라고 하면서 일본의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참가에 찬성하였다.
소유 빌딩의 사무소비
스가 히데요시가 대표로 있는 자민당 지부와 후원회가 둘 다 스가 히데요시가 소유한 빌딩에 주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2005년분 정치자금 수지보고서에 사무소비로 합계 1956만 엔을 계상한 것이 2007년에 알려졌다. 평론가 시오타 우시오(塩田潮)에 의하면, 제1차 아베 내각에 관방장관으로 기용될 수 있었으나 이 보도로 인해 기용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총무대신 재임 시기의 정치자금 파티(政治資金パーティー)
제1차 아베 내각의 총무대신으로 재임하던 중에 개최한 파티에서 수입 약3180만 엔의 수입을 올린 것이 정치자금 수지보고서에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기업으로부터 받은 헌금
스가 히데요시가 대표로 있는 자민당 지부가, 농림수산성으로부터 보조금을 교부 받은 요코하마시 미나미구(스가 요시히데의 지역구에 포함)의 조경회사로부터 2011년~2013년에 총 29만엔의 헌금을 받았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해당 지부는 2014년 중의원 선거 공시 직전에 국가로부터 공사를 수주받은 요코하마시의 사업자로부터도 15만엔의 헌금을 받았다고 보도되었다.
백지 영수증에 나중에 금액을 기입
다른 국회의원의 정치자금 파티에 참가했을 때, 비용 영수증을 백지로 받은 후 사무소에서 금액을 기입한 사실이 있다고 보도되었다. 그렇게 한 이유에 관해 "파티 주최자의 동의 하에, 실제 날짜와 수신인 주소·금액을 정확하게 기재하였다"라고 하면서, "수백 명 규모의 출석자 전원의 수신인 주소와 금액을 그 자리에서 적으면, 접수하는 곳이 혼잡해진다"라고 발언하였다.
정치자금규정법 업무를 관장하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무대신은 "영수증 작성 방법과 관련된 규정은 없다. 주최자로부터 동의를 얻는다면 법률상 문제는 없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다만 총무성의 안내에 의하면 영수증을 받는 측에서 영수증에 기록을 추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하는 보도도 있었다.
2016년 10월 11일 자민당은 당 소속 국회의원들에 대해, 영수증을 발급할 때에는 금액 등 필요사항을 사전에 기재하도록 안내를 하였다.
평가
2014년 산케이 신문과 FNN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각료" 1위를 차지하였다. 2위는 아베 신조 총리가 차지하였는데, 산케이 뉴스에서는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각료'라고 질문을 했기 때문인가"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아베 신조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 중 한 명'이라고 한다.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이 관료의 문제 발언 등으로 혼란한 와중에도 존재감을 늘려 나갔다. 지방분권 개혁 추진법 등 19개의 법률안을 만든 것과 함께, 고향납세(또는 고향 기부금, ふるさと納税 또는 ふるさと寄付金) 추친·연금기록문제에 대한 총무성내 위원회 설치 등, 각료들의 스캔들이 속출했던 제1차 아베내각 내에서도 안정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2012년(헤이세이 24년)의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서는 빠르게 아베 신조를 지지하여,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는 내각관방장관에 발탁되었다.
스가 요시히데의 선배인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가 자민당에 복당할 때, 히라누마가 보안법안에 관해 찬성했던 점을 좋게 평가하면서 "자민당 입장에서 여러 문제에 관해 판단하여 복당이 받아들여졌다고 본다"고 하였다.
관방장관 회견에서는 침착한 모습을 보여, "철벽의 가스(鉄壁のガースー)"라는 애칭으로 볼리기도 한다. 하지만, 학교법인 "가케 학원(加計学園)"의 수의학부 신설계획을 둘러싼 문제에 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뜨거워져서, 냉정함을 잃었다"라고 산케이신문(産経新聞)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 스승으로 받드는 가지야마 세이로쿠로부터 "관료는 자신의 생각이 있고, 정치인에게 설명을 할 때 반드시 그 생각을 주입하려고 한다. 너는 금방 거기에 속아 넘어갈 거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폭넓은 분야의 전문가와 인적 교류를 가지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에 내각관방장관으로 취임할 때에는, 가지야먀 세이로쿠의 묘에 방문하여 취임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다.
● 총무부대신 시절에 총무대신이었던 다케나카 헤이조와 자주 의견을 교환하였다고 한다. 다케나카가 주가를 올리기 위해 연금적립금 관리 운영 독립 행정법인을 이용하는 것을 제안하자, 스가는 후생노동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즉시 전문가 회의를 설치하였다. 다케나카는 2020년 도쿄 올림픽 구상 등도 스가가 주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였다.
● 산토리 홀딩스(サントリー Holdings) 사장인 니이나미 다케시(新浪剛史)와도 교류가 있어서, 오키나와에 테마 파크 건설을 검토하던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Universal Studio Japan)의 운영회사 USJ의 사장 글렌 검펠(Glenn Gumpel)을, 오키나와 정책을 위해 니이나미로부터 소개받았다고 한다.
● 헤지펀드 서드 포인트(Third Point)의 최고경영책임자 다니엘 로브(Daniel Loeb)와 회견을 갖고, 아베노믹스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고 한다.
● 주일 미국대사를 2013년부터 4년 간 맡았던 캐롤라인 케네디(Caroline Bouvier Kennedy)와 매월 회식을 가졌다고 한다.
● 박근혜 정부 시기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이병기와는, 이병기가 주일대한민국대사를 맡던 시절부터 관계를 갖고, 대사 이임 후에도 전화로 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沢勝栄)에 의하면, 스가는 스스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적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들어 주는 타입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동급생이었던 전 주몬지정(十文字町) 정장(町長) 오카와 겐키치(小川健吉)도, 아버지 스가 와사부로와 달리 스가 요시히데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고,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듯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스가 스스로도 자신을 수수하고 성실한 성격이었고, 특히 퍼포먼스는 서툴다고 한다.
2016년 4월 1일의 특례 기자회견에서, 만우절 관련 농담은 없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는 지나치게 고지식한 사람이라, 유머 없이 착실한 발언만 했다"고 하며, 관방장관의 입장도 있어서 거짓말이나 농담은 삼가고 있다고 답변하였다.